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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의 문화

보령의 문화 글의 상세내용
제목 무장 김성우
구분 역사인물
내용 왜구의 침입을 막아낸 武將(무장) 김성우

왜구(倭寇)가 우리나라에 침범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高麗)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가 작은 섬나라에서 자란 백성들이라 예의 보다는 복종을 평안보다는 군림을
즐기는 민족이라 칼을 쓰기를 좋아하고 약자에겐 탄압을 무기로 자라난 그들이라 침략을 좋아하고 힘의과시를 즐기는 나라가 왜구였다.

그들의 침략은 고려(高麗)때부터 심해진다. 더구나 궁중 정치를 으뜸으로 하였던 우리나라에서 지방까지 군사적 힘이 미치지 못함을 알아낸 왜구들은 고려(高麗)충정왕(忠定王)2년때부터 공양왕(恭讓王) 4년까지 약 400년간은 왜구의 침범이 없는 해가 없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침범할때는 500여척으로 선단을 조직하여 서천포(舒川浦)에 정박하고 침범 한때도 있었고 그들은 내륙지방 깊숙히 청주(淸州) 금산(錦山)까지 쳐들어 왔을때도 있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약탈하는 것은 주로 곡식이었다.

고려(高麗)때 지방(地方) 여기저기에 적재해놓은 곡식이 사창(社倉)이라해서 많이 방치해 놓을만큼 곡식이 많음을 탐지한 그들은 우리나라에 침입해서 곡식을 강탈해 갔으며 또한 농민들을 닥치는대로 살상을 했다. 이와같은 사실을 조정에서는 알고 있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에 비로서 정벌에 나섰다.

이 때 가장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보령시(保寧郡) 남포(藍浦)지방의 적을 무찌르러온 고려(高麗)장군이 김성우(金成雨)다. 그는 광산이 본관이며 판서 김윤장(金允藏)의 아들로서 무인으로서의 재능이 뛰어난 장군이었다.

그는 초토사로서 보령(保寧)에 들어와선 성주산(聖住山)에 진을 치고 황폐한 산락에서부터 철책을 치듯하여 왜구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10여년간 왜구에 짓밟힌 성주산(聖住山) 아래의 남포(藍浦) 웅천(熊川)일대는 무인지경이었다. 농민의 집 지붕에서도 풀이 나있었으며 완전히 폐허화한 들이었고 강이었다.

김성우(金成雨)는 왜구에게 보이기를 산에 진을치고 머뭇거리는 것처럼 며칠을 보이게 하다가 새벽녘을 기해서 그들의 선단이 집결해 있는 군입리(軍入里)쪽으로 쳐들어가 잠깐사이에 적의 선박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리고 이 곳에 진을 옮긴 듯 서서히 산을 넘고 안쪽으로 쳐들어갔다. 그가 생각하기를 왜구를 하나도 섬나라에 보내지 않으려는 작전이었다. 배를 잃고 길을 헤메는 왜구들의 저항도 심해갔으나 그들은 첫째 먹을것이 없었다. 최후 발악하는 왜구들을 모조리 섬멸하고 서천포(舒川浦)쪽으로 도망치는 왜구를 배를 몰고 서천군(舒川郡) 마량포(馬梁浦)로 군사를 옮겨서 적의 퇴로를 막았다. 왜구들은 퇴로마저 막히자 성주산(聖住山) 북쪽으로 빠져서 청라(靑羅)쪽으로 달아났다.

김성우(金成雨)는 성주산(聖住山)에 남겨놓았던 군사들을 내려오게하고 의평에서 마지막 싸움이 벌어졌다. 십리를 가도 오십리를가도 먹을 것이 없는 왜구들은 우선 기진맥진하여 들판에 누워있었다.

김성우(金成雨)는 부하장병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 군사들은 적이 괴로울때는 포로로 하는 수가 많으데 이번 기회엔 포로가 있을수 없다고 했다. 40여년간 우리백성을 괴롭힌 왜구들은 죽여마땅하니 한놈도 남기지말고 죽이라고 했고 산에서 길을 막고 뒤에서 쫓는 우리군사에게 손을 드는 오랑캐도 있었다. 허나 용서없이 죽여버렸다. 마치 그들에게 죽은 선량한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듯 마구 무찔렀다.

그래서 끝내 우리나라를 침범해오던 왜구들에게 대한 원한을 풀게된 것이다.

김성우(金成雨)는 왜구를 몰아내고 남포지방(藍浦地方)에 살던 백성들을 불렀다. 이제부터는 왜구가 침범해와도 우리군사가 무찌르겠다고 사방에 알렸으나 좀처럼 백성들이 모여들지 않았다. 그는 군사들을 풀어 농사를 짓게 했다. 오랫동안 갈지않은 전답을 다시 갈고 물을 대서 곡식을 심으니 곡식이 푸릇해졌다.

아주 자기땅을 버리고 멀리 산중에 숨었던 이 곳 정착민들이 고향에선 군사가 전답에 곡식을 갈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실인가 알아볼겸 이곳에 왔다가 곡식이 무성하고 군사들이 성의껏 농사일을 돌봐주는데 감명을 받아 이제는 새로운 세상이 돌아왔다고 모두 기꺼워 하여 다시 자리를 잡게되었다.

김성우(金成雨)는 그래도 바닷가의 경비를 소홀히 하지않았다. 남포(藍浦)에 진을 두어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그후 십여척으로 편성된 왜구가 침범해오자 그들을 모두 사로잡아선 이곳에서 농사일을 시켰다. 혹독하게 다루며 왜구들은 농사일을 하다가 10여년만에 풀어줘서 배에 실어 보내기도 하였다.

김성우(金成雨)는 한나라가 튼튼해지는 힘은 조정보다 백성의 힘에 있다고 늘 말해왔다. 백성이 잘 살게하는데에는 그들이 마음놓고 일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조정에 알려서 수군까지 연안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그후는 왜구의 침범이 있을때도 그들을 조금도 여유없이 무찌를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으니 모두가 김성우(金成雨)의 공이라고 볼 수 있다.

왜구에게는 호랑이요 백성에게는 울타리였던 김성우(金成雨)장군은 보령(保寧)땅에 큰공을 세운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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